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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책...책...책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 12권

 

 

(38. 승자와 패자)

지하실. 여자의 눈을 가린 검은 천이 풀리고 드러난 얼굴은 다름 아닌 최현옥이었다. 그리고 고문을 하는 사람은 양치성. 만년 계장이었던 그는 이번 일을 잘 파헤치면 승진을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걸로 생각하고 취조를 시작하며 담배를 물었다. '죽음을 택할지언정 조직의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된다. ' 피로 쓴 문구를 최현옥은 떠올린다. 손을 뒤로 묶여 저항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최현옥은 갖은 성적인 수치심도 굴하지 않자 지친 양치성은 취조를 내일로 미룬다. 최현옥은 차라리 승복을 하는 것 보다는 시멘트 벽에 머리를 박아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실천하는데 결국 최현옥은 승자였고 양치성은 패자였다.

 

 

 

(39. 두 여자)

지요코는 일본 여자. 조직을 은폐하고 수사기관의 눈초리를 피해 조직원들의 노출 행동을 절대 하지 않기로 되어 있는 원칙을 생각하는 동지.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지요코는 전동 걸에게 사랑의 감정에 빠지기 시작했고 그 깊이가 점점 깊어 간다. 전동 걸과 이미화가 활동사진을 같이 보고 같이 있는 것을 본 다음부터였다. 이미화는 동경 한국 유학생. 그녀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나간 전동걸은 생일선물로 "투르게네프" 단편집을 받고 책 속에서 새하얀 손수건을 발견한다. 그것은 곧 사랑의 고백. 순결을 바친다는 뜻...손수건 한편에 수 놓인 장미 한 송이. 그것은 사랑을 뜻했다. 전동 걸은 두 여자를 비교해 보며 이미화는 감칠맛 있고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한다.

 

 

 

(40. 인간사냥.)

천황폐하의 칙령을 받들고 대일본제국육군성의 명령에 따르는 일. 육군성에 징용자들은 화급하게 필요하니 남자를 눈에 띄는 대로 무조건 사냥하라..... 이 시바는 칼을 막대기에 꽂으면서 명령했다. 농사도 못 짓는 남자 병자를 포함하여 규수 탄광에서 고생을 하고 돌아온 남자. 열다섯도 안돼 보이는 소년. 주막에서 밥을 먹던 남자등등 이 시바가 끌어 온 68명의 남자들. 목표 300여 명을 채우려면 5일이 더 걸려야 했다. 정방현도 붙들려 왔으나 만석꾼이라고 풀려났고, 아침 일찍 논에 나갔다가 집에 와서 밥을 먹던 차득보가 잡히고 그 동네에서 여덟 명이 더 붙들렸고 사회주의 비밀조직에 속한 서근호도 붙들렸다. 이렇게 끌려 온 남자들은 18시간 항해 끝에 시모노세키에 도착했으며, 도주방지와 군공사의 기밀보호이유로 강제 연행된 노무자들은 전부 화물차에 태워져 도착한 곳....차득보도 홋카이도 섬에 내렸다.

 

 

 

(41. 정복되지 않는 혼)

감옥에 갇힌 송중원과 면회 온 아들 송준혁의 대화. "배움은 힘이다. 배워야 이긴다." 죄명도 형기도 없는 죄수 송중원. 1944년 8월 1일 시행된 징병제로 송준혁은 눈 앞에 닥친 위기를 느낀다.  아버지가 징용에 끌려간 배필용과 금예의 아들의 이름을 지어 준 전동걸. 그 이름은 裵制日.... 그리고 이틀 후에 부산으로 떠난다. 이미화의 손을 잡으려다 실패한 전동걸. 그는 또 지 요코와 조선 처녀 이미화를 비교하게 된다. 정조관념이 많은 조선 처녀들. 징병이 심해지고 점점 노동자들은 여자로 대체되고 있었다. 일본에서의 사혁회에서는 조선의용군을 선택하며 그 시기를 학병 징병검사 시기와 같이 잡고 그때 탈출하는 것으로 결의. 여자 하나 남자 하나... 부부나 연인으로 가장하자는 것이었다. 관부연락선에는 조선 학생들이 많았다. 일본인 형사들은 검문을 심하게 하지 않았고 그 이유는 학병 징병검사하러 간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2. 학병의 파장.)

11월에 들어서 총독부에서는 대학 전문학교 고등학교에 일제히 징집영장을 일제히 발급했다. 1차로 학병 적격자 959명이 지원을 완료했는데 관부연락선이 미국 잠수함에 격침되는 바람에 54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12월로 접어들면서 징병적년을 1년 낮추는 긴급사태가 야기되고 있었다. B29라는 폭격기가 일본 상공에 나타나고 남지나해에서 수송선들이 폭격을 당해 침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현상은 사실로 받아들였다. 정도규와 유현상은 지리산으로 학병에 나가는 학생들을 보내어 최대한 구하자고 이현상에게 제의했고 실제로 신세호의 외손자를 비롯해서 송준혁이 지리산으로 갔으나 그 인원은 파악되지 못했다. 한편 법학 공부를 하러 경성제대 법학부에 다니던 박용화는 일본 징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43. 종군위안부들의 행로)

복실이와 순임이는 잘 먹여 주고 선도금도 20원을 주며 한 달 임금이 30원이라는 직업이 있다는 꾐에 넘어가서 여자가 가져온 뾰족구두와 옷 두 벌을 받고 가슴 설렌다. 2년 돈을 벌어서 논을 사고 밭을 사겠다던 그녀들... 그녀들은 전주로 갔고 허름한 여인숙에 갇혔으며 머리를 잘리고 원피스로 옷을  갈아입는다. 속임에 빠진 것을 안 처녀들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매를 맞았으며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기차에서 내린 곳은 부산. 수용소 같은 창고에 갇혀 있는 여자들 걸핏하면 주먹질로 두들겨 맞고 7일 만에 끌려간 곳이 부두였는데 그곳에 모인 처녀는 무려 80여 명에 달했다. 공장에 보내주는 것이 아니냐는 처녀들의 질문에 기다리라고 하던 사람들은 그녀들을 또 배에 태우고 사이공에 도착했는데 그곳이 바로 위안소였던 것이다. 목욕을 마친 일본군들이 들이닥쳤는데.... 처녀들의 반항은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그녀들은 그렇게 희생되어 가고 있었다.

 

 

 

(44. 해바라기 군상)

대동아 회의는 1943년 11월 5일에 만주국 중화민국 필리핀 공화국 타이 국 버마 국 대표들이 동경에 모여 일본 천왕을 배알하고 대동아 100년의 평화와 번영을 논의한 회의였다. 민동환 박정애... 그리고 여류문인들 미술가며 음악가들이 이미 적극적인 친일활동으로 돌아섰는데 윤일랑은 씁쓸함을 느끼면서 그 재능이 안타깝기만 했다. 또 만해 이육사의 죽음 앞에서 그는 한숨을 쏟아냈다. 홍명준이 일본인과 사돈을 맺고 민동환은 국민총력연맹 지부에서 내선일체 정책에 호응을 잘했다는 취지에서 표창을 받았다. 더 충성하자고 박정애와 민동환은 환히 웃었다. 

 

 

 

(45. 당신은 아는가.)

지시 마 열도의 비행장 활주로 공사는 완전히 끝났고 격납고 내부공사도 완료. 이제 남은 것은 이 둘을 연결하는 짧고 좁은 길들 뿐. 그러나 아직 계약기간이 20일이나 남아 있었다 20일만 지나면 집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 노무자들. 그러나 공습 신호가 울리고 노무자들은 1시간 이상 방공호에 갇혀 있다가 나왔는데 이틀 후에 또 울린 공습경보. 방공호에 숨어 있던 노무자들 앞에 위장막이 치워지는 순간 일본군인들은 일체 수류탄을 던졌다. 방공호에 갇힌 징용으로 끌려 온 1천여 명은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했다. 새신랑 배필룡도 그렇게 죽었고 이미 열도 여러 섬에서 4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똑같은 식으로 죽어 갔다. 피가 골짜기를 이루어 흘렀다.

 

 

 

(46. 하늘이여 하늘이여)

천주교 대전 성당의 심기헌 신부. 8월부터 총독부에서 성당을 군대용으로 강압 접수. 그 이유는 창씨개명을 반대하고 신사 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탄광에 끌려 온 심기헌 신부는 웃음 감도는 얼굴로 성직자다운 여유와 겸손으로 사람들을 대했고 사람들도 그를 신기해하며 선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두 명의 도망자가 생겼는데 조선인 십장이 돌아가면서 그에게 돌을 던지라는 명령. 심기헌 신부 차례가 되자 그는 돌을 자기에게 던지라고 소리쳤다. 그는 나머지 돌을 홀로 맞으며 독방에 갇혔고 만 사흘 만에 풀려난 심기헌 신부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는데 그들은 노 무지들과 그의 시체를 똑같이 취급했다.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가?

 

 

 

(47. 거짓말의 현장)

학도병으로 미얀마 전투에 투입된 박용하는 배신과 절망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달포 전 부산을 떠나 올 때만 해도 무적의 황국. 도처에서 연승을 거두고 신문과 방송에 떠 들어 댔는데 제공권과 해상권을 일본은 이미 적에게 빼앗겼다. 일본 지휘부는 사기진작의 한 방법으로 전부 조선 처녀로 구성된 성노리개 20여 명을 위안소에 배치. 박용화가 만난 그곳의 복실이를 보면서 박용화는 가슴 저리는 아픔과 함께 분노를 느낀다.

 

 

 

(48. 걸어서 반만리)

대항 산록의 조선의용대에 입대한 전동걸. 3개월의 강도 높은 훈련을 마치고 전투요원이 되었다. 부부행세를 하며 경찰들의 검문을 피하던 지 요코는학벌을 고려해서 선전부에 배치된다. 전동 걸의 출동명령. 권총과 단검 허름한 사복에 배낭을 소지하고 떠나는 길에 동행자는 선임병 하나. 그들은 산 넘고 물 건너 걸어서 반만리를 걸어서 마침내 임무를 완성한다. 지 요코와 한방을 쓰게 된 두 남녀는 자연스럽게 부부처럼 되었으며 전동 걸은 두고 온 이미화 생각을 많이 한다. 

 

 

 

(49. 음모 음모)

만 12살부터 40살까지 배우자가 없는 여자들을 끌어 간다... 총독부에서는 20만 명에서 30만 명의 정신대를 모집하고 하시모토는 은밀하게 말썽의 소지가 없는 딸을 가진 집을 조사했다. 그리고 집중적으로 한 동네에서만 끌어내리지 말고 분산해서 끌어내라고 명령했다. 일본이 군용 위안소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만주침략 이후였는데 조선의 처녀들을 끌어내는 거짓말도 가지가지..... 남의 물건을 훔친 여자에게 딸을 내놓으라 했고, 돈벌이 좋은 곳으로 취직을 시켜 준다고 했으며 간호부가 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는 사기극을 벌이며 그 음모에 넘어간 처녀들이 결국 간 곳은 군용 위안소였던 것이다. 6월 15일에

 

 

 

(50. 패전의 길)

삼 월 이는 군인들을 거부하다가 끝내 바닷가에 몸을 던져 죽음을 택했고 남아 있는 순임이는 606 성병 예방주사를 맞으며 그 생활을 계속했다. 어질어질하고 구역질 나는 주사. 문 앞에서 이별해야 했던 어머니의 눈물과 얼굴이 떠 올랐다. 1944년 6월 15일에 사이판섬에 상륙작전을 개시한 미군은 7월 10일 작전을 성공시켰다. 며칠이 지나고 위안소가 불탔으며 그 폭격은 하루 종일 이어졌다. 연합군은 1944년 9월 15일 파라오의 한 섬인 페리 류에 상륙했으며 쏟아지는 폭탄 속에서 복실이는 식당 아주머니들에게 숨겨 달라고 했으면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위안부들은 30분에 한 명씩 하루 종일 짓이겨지고 있었으며 복실이는 조선 청년을 거기서 만난다. "일본은 곧 질 거요." 그가 남긴 말이었다.

 

 

 

(51. 아이누족의 온정)

특이하게 생긴 아이누족. 일본인과는 금방 구별이 되었다. 그들도 일본 사람에 밀려서 산간으로 밀려 천대받는 사람들이었다. 차득보는 도로공사장에 투입되고 하루 12시간씩 중노동을 하니 농사일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탄광만 지옥이 아니라 이 도로공사장도 지옥이긴 마찬가지... 그리고 도망자는 까마귀 밥이 되는 현실. 그런 가운데 차득보가 공사가 없는 비 오는 날에 도망을 결심한다. 변소 뒤 철조망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서 무릎까지 차는 물속을 헤치며 도로까지 탈출했다. 아이누족이 사는 마을. 그는 첫 번째 집을 두드렸다. 조선인이라고 도와 달라 하자 집안 모든 사람들이 나서서 차득보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특히 아이누족과 함께 사는 조선인을 만나서 그는 한숨 돌렸다. 일제는 160여만 명을 강제징용에 끌어냈고 30여만 명의 여자들을 정신대로.... 전쟁터에 40여만 명의 젊은이들을 끌어냈다.

 

 

 

(52. 첫새벽)

학병을 피해 지리산으로 들어온 학생들은 화전민의 거처에 따라 여러 골짜기에 분산되어 있었다. 송준혁도 피아골에 있었고 사회주의 지하 운동가 이현상은 학생조직을 군대 편제로 구성. 철저한 점조직으로 운영해서 몇몇이 붙잡히더라도 조직 전체는 발각되지 않게 하루도 빠짐없이 학습시키고 체력단련도 하며 토론해서 그들이 농사를 짓지만 사회주의자로 키우고 있었다. 미곡 공출과 배급을 맡고 있는 식량 영단에서 홍 씨 집을 뒤지나 나오는 것이 없자 돌아갔다. 징용과 징병으로 농사 지을 사람이 점점 없어지자 대지주들은 소작인들을 구하지 못해 자연스럽게 식량 감소로 돌아 섰다. 딸은 정신대로 보내고 아들은 징병에 보낸 아버지는 공출할 칡넝쿨을 거두려고 산비탈을 타고 있는 김서방... 참으로 기구한 삶이다. 이 삼 년 전에 이미 국민총력연맹에 놋쇠 기구들을 빼앗긴 사람들은 이번에는 숟가락도 빼앗긴다.

 

 

 

(53. 허깨비 군대)

윤철훈의 사진관이 발각되고 아내는 작전대로 지하실에 피했다가 이튿날 하얼빈행 열차에 오른다. 한편 윤철훈은 가죽 채찍으로 맞고 고추가룻물로 고문을 당하며 전기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관동군은 허깨비 군대라고 송신된 것. 그는 특별 수송자라 하여 6일 만에 헌병대를 떠났고 하얼빈 어느 지하실로 끌려 왔다. 그곳에는 열댓 명이 쇠사슬에 발목이 묶여 있었으며 두들겨 맞아서 피멍이 잡혀 있었고 옷도 피투성이였다. 그들과 함께 끌려 온 윤철훈. 그들과 함께 목욕을 하고 호열자 예방주사를 맞자던 50대 남자는 윤철훈 팔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이른바 그는 세균전 부대에 생체실험용으로 보내졌던 것이다.

 

 

 

(54. 해방 그리고 비극)

소련군은 8월 8일을 기하여 일본에 선전포고와 함께 진격을 해왔다. 지만복이 속해 있는 소대원들은 죽을힘을 다해 팠던 세 개의 방어선이 단 하루 만에 무너졌으며 군에게 정말 포위당한다. 포로 지만복. 같이 포로가 된 중대원들과 함께 흑룡강을 건너서 소련 땅을 밟는다. 그리고 남만석의 부락에서도 일본군과 경찰들은 전쟁에 진 것을 알고 다 도망갔으며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지르며 그들의 창고를 뒤져서 배불리 밥을 먹었다. 그러나 그들이 고향을 향해서 길을 나서지만 그들을 막아선 중국인들과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여자들은 그것을 피하려 아이들을 데리고 끝없는 광야 저 쪽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는데, 두만강과 압록강은 점점 멀어져만 간다.

 

어느 해 광복절 즈음  나는 인터넷에서 사람을 상대로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생체실험하려는 사진을 보았다.

의자에 묶인 어떤 남자의 두려움 가득 찬 눈동자....

 나는 그 눈동자 생각에 한동안 괴로웠던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1천만 부 돌파"라는 한국 출판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웠던 민족 소설 "아리랑"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 12권을 읽으면서 마지막권은 읽기 싫었고 화가 났으며 정말 짜증이 났다.

사실은 좀 기대를 했었다. 마지막권에.....

일본이 폭삭 망하는 거라든지...

일본이 곤경에 처하는 반전을 기대했었는데, 그러나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은 이런 나의 기대를 저버렸다.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도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게 잔인했을까......

"우리 고전에는 놀부가 있다. 그는 제비 다리를 부러 뜨린 후에 다시 감아 주고...

일본 고전에는 참새 혀를 칼로 도려낸다는 내용이 있다"는 어느 교수님의 강의.

우리와 일본의 민족성이 정말 잘 드러나는 이야기이지 않을까?

 

 

"인생은 무상하다.

그러나 역사는 치열하다.

식민지의 슬픈 역사 위에 나는

불붙어 타고 싶은 하나의 가랑잎."-허진-

 

 

나는 각권마다 열심히 자세한 후기를 남겼다.

일본의 행위를 절대 잊지도 말고 용서해서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912년생 돌아가신 친정 할머니.

1933년생 동갑이신 친정부모님.

1931년생의 시아버님.

1935년생의 시어머님.

그분들은 일제의 그 간악무도함을 잘 아시지 않았을까....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하는데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국가의 상황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