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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천주교

모슬포성당(2022. 2.23)

*제주특별자치 시도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805

 

1901년 신축교안이 발생한 이후 반(反) 가톨릭적인 분위기가 남아 있었던 모슬포에 가톨릭 교세가 호전되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 무렵부터이다. 이 지역은 이미 중일(中日) 전쟁 직후 일제에 의해 군용 비행장이 건설되면서 중국 폭격 기지로 이용되었으며, 1951년 3월 21일 육군 제1훈련소가 들어선 데 이어, 중국군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는 등 군사 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에 따라 1951년 안달원(安達遠)[베드로] 신부와, 메리놀회 소속의 설리번(H. Sullivan, 薛) 신부가 훈련병 및 중국군 포로 신자들의 사목을 담당하기 위해 각각 파견되었다. 그러나 모슬포 지역의 기지촌화(基地村化)로 점차 전입인구와 교우 수가 증가하여 이들을 위한 별도의 사목이 필요하게 되자, 설리번 신부는 1952년 말 현 본당 소재지의 부지를 매입하였다. 곧바로 시작된 성당 신축 공사는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되고 8월 5일부터 남북한 간에 포로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그 규모가 축소되었다. 이듬해 2월 15일 36평의 성당을 완공하여 3월 7일 축성식을 거행하였는데, 이후 이 성당은 중국군 포로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뜻에서 건축 공사에 참여했다고 하여 ‘통회(痛悔)의 집’으로 불렸다.

1955년 11월 육군 제1훈련소의 3대 군종 김덕제(金德濟)[치릴로] 신부가 새 임지로 떠나게 되면서 군종 신부의 대민(對民) 사목은 종료되고, 이 지역 신자들은 서귀포 본당 관할의 모슬포 공소로 편입되었다. 이 시기에는 가톨릭 구제위원회(Catholic Relief Service : C.R.S.)의 원조 물자를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를 전교와 연결시킴으로써 많은 주민들이 세례를 받았다. 이에 1957년 초 당시 서귀포 본당의 주임 브래디(R. Brady, 牟) 신부는 이 지역에 본당 신설 계획을 세운 후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였으며, 1958년 6월 27일에는 모슬포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

정난주 길의 종점. 모슬포 성당.

이 날도 제주 바람은 엄청 거셌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알오름 위령탑에서 천주교 순례길이 표시되어 있었으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 드넓은 알뜨르 비행장에서 우리는 정말 많이 헤맸다. 그리고 이규석 삼부자 순교자 묘도 결국 찾지 못했다. 모슬포 성당의 성의 없는 답변. 정난주 길의 책임 성당이 이럴 수 있나?  제주교구에 문의하라는 답변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스탬프 찍는 곳도 없었고 그런 사실조차 모른다는 답변. 세례 받을 때 신부님께서 그러셨지. "사람을 보고 천주교를 믿지 말라"라고..... 그들도 불친절한 신자, 사람들이었다. 길 안내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제주교구도 순레 길 정비를 신경 써서 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