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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역사. 문화. 예술. 공연 .노래

"안중근의사 서거 107주기" (안중근 기념관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 서거 107 추모주기 참배홀.

 

 

 

 

1910년 3월 26일

일제의 사형집행으로 32세 나이에 순국하다.

 

 

 

 

격동의 시대.

안중근의사의 출생과 성장과정.

 

 

 

 

항일독립운동의 명가로 15명이 독립운동의 공로로 서훈을 받았으며

안의사께는 최고훈장인 '건국훈장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안중근의사는 1897년 천주교에 입교한 후 수년간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천주교 전파활동을 펼쳤다.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안중근의사와 을사늑약.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운영하는등 조국과 민족을 되살리기 위해

활발한 교육활동을 펼친다.

 

 

 

 

안의사는 항일운동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

연해주, 중국의 산둥 상하이등지를 시찰한다.

 

 

 

 

1909년 초 11명의 동지들과 일심단결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단지동맹을 맺는다.

 

 

 

 

의병으로 구국을 도모하고자했던 안의사는 1908년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한다.

이때 안의사는 생포한 일본군 포로들을 만국공법에 의하여 석방하는 등

평화사상을 보여 준다.

 

 

 

 

하얼빈의거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다.

 

 

 

 

안의사는 하얼빈의거가 한국 독립운동의 한 부분이며 대한의군 참모총장의

자격으로 행한 것이므로 만국공법에 의해 처리해 줄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법정은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언도한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안중근의사 숭모회)

 

 

 

 

기념관을 나오면서 바라다 본 하늘.

 

 

 

 

"하루라도 글을 잃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안중근의사가 남긴 유명한 글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하얼빈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사를 모르는 분은 아마 없을 거예요.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가 471번지.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남산 아래 자리하고 있는데,

안중근의사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물론 단지동맹등 독립활동,

하얼빈의거,옥중투쟁과 재판,

순국등 의사의 행적을 그대로 보여 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넘어 가는 하루 해를 바라보면서 기념관을 나왔는데요.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서 32세에 간 안의사가 아깝기도 하고, 

처연해 보여서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진은 제가 담았고, 사진에 대한 설명은 "안중근의사 기념관"이란 책자에 나와 있는

글을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