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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역사. 문화. 예술. 공연 .노래

운현궁(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다하지 못한 이야기가 서려 있는 곳)

 

 

저는 종로에 가면 눈에 띄는 특색있는 건물을 봅니다.

 덕성여대 운니동 캠퍼스에 있는 서양식 건물과,

은행나무 고목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천도교 건물인데요.

 

 

 

 

이 덕성여대 현대식 건물, 교동초등학교,삼환기업,일본대사관까지 엄청난 규모의 운현궁이었지만,

지금은 노락당과 노안당,이로당정도로 운현궁은 아주 작은 규모의 궁으로 남아 있습니다.

"운현"이라는 이름은 그 곳 언덕 이름이었대요.

"흥선군 이하응"의 신분이 대원군으로 바뀐 시점부터

이 운현궁의 역사가 시작되는데요.

솟을 대문에 밖으로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이 운현궁이 얼마나 일본으로 인한 치욕적인 역사의 현장인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보수공사로 안으로 잠금장치가 되어 있지만요.

 

 

 

 

 

 

 

 

 

 

 

 

 

 

 

 

 

 

 

 

 

 

 

 

 

 

 

 

 

 

운현궁 노락당

안방주인의 위엄있는 눈길이 느껴 집니다.

처마와 쪽마루 사이에 문들이 도열되어 있지요?

평생 고생만 시킨 부인에 대한 미안함과 애틋한 대원군의 마음이 엿보였습니다.

 

 

 

 

 

운현궁 이로당

제일 깊숙히 위치한 건물인 이로당은 "대원군과 명성왕후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듯 했습니다.

조선시대에서 유일하게 황후와 왕을 배출했던 대원군에 한때 저도 매료된 적이 있었어요.

안동김씨의 외척들에게 손을 든 대원군은 친인척이 많지 않고

호화스럽지 않은 규수를 간택했는데 그가 명성황후이었답니다.

 

 

 

 

 

 

 

 

원래 대원군과 명성황후는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원군은 뚝심과 야심으로 가득찬 인물이었고,

명성황후는 주위 참모들의 덕분으로 세상 돌아 가는 정세나 해외 소식에 밝다 보니,

개방정책에 호기심을 보였으니 쇄국정책을 고집한 대원군과 많은 생각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지요.

 

 

 

 

 

 

아들을 낳지 못해서 노심초사 하던 명성황후는 어느 날 잉태를 하여 낳고 보니 왕자였어요.

너무나 좋아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황후이지만 기본은 소박한 한 여인이기 때문인데,

아뿔사!!

아이가 항문이 막혀 있더랍니다.

제중원을 통하여 알아본 결과 한 서양의사가 수술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왕손에 칼을 댈 수 없다고 대원군은 거절했대요.

국제정세에 밝았던 황후는 고종황제를 위하여 철저히 내조를 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대원군과는 소원한 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운현궁 노안당

날렵하게 올라간 추녀 끝. 목수의 섬세함이 느껴집니다.

운현궁의 사랑채.

쇄국정책으로 외세에 맞섰던 대원군의 주된 거처.

 

 

 

 

누군가 역사는 "가정"이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저는 이렇게 가정해 보았어요.

안으로만 고집한 대원군과 밖의 정세가 더 관심사였던  며느리 명성황후가

 서로 좋은 점만을 추구했더라면,

우리의 역사도 더 많은 발전을 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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