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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가족. 일상

자랑스러운 내 동생

 

 

 

 

 

 

"언니, 나 교감자격연수대상자 명단에 올랐어"

"축하, 또 축하한다. 엄마는 2년만 더 사시다 가시지.

셋째 딸의 오늘처럼 좋은 날 보시고 가셨으면 얼마나 좋으셨을까?"

 

 

 

동생이 대학에 입학하던 해는 아버지께서 친구 보증을 잘못 서시는 바람에,

집도 절도 없이 거리도 쫒겨 나을 뻔했던 때였다.

동생은 동네교회의 어린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일을 했고,

또 다른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충당해야 했었다.

음악대학에 다니는 아이들 특성상,

집에 에스칼레이터가 있고 연못에서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유유히

놀고 있다던 친구집을 비롯한 다른 친구들과 비교해 심한 상대적인 빈곤감에 빠지기도 했으며,

어떻게 4년을 버티었는지 모를 정도로 동생은 가장 경제적으로 힘든 대학생활을 마쳤다.

 

 

 

 

 동생이 대학을 졸업 하던 해에 응시한

경기도가 주관하는 공립학교 음악교원 임용고시에 합격을 했고,

첫 부임지인 강화교동도의 섬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시시때때로 이남을 비방하는 북의 선전방송.

사과상자를 이어 만든 침대에서 생활을 할 정도로 열악했던 관사 생활.

서해의 누런 흙탕물과 섬이라는 울타리는 동생으로 하여금  우울한 일상에 동조를 했었다.

그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 머리에 노랑물과 빨강 물을 번갈아 들이는 세월도 있었으며,

그 후 부천으로, 안산으로, 연천으로, 포천으로, 의정부로 정말 많은 학교를 옮겨 다녔다.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 때문에 결혼식 전날 밤새 울어서

결혼식 사진이 온통 퉁퉁 부은 것뿐이고,

공무원인 남편이 음주운전으로 구속되었을 때도,

그 특유한 침착함과 사람의 정곡을 찌르는 언변으로 합의를 이끌어 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남편의 일로 가지고 있던 전재산을 잃었을 때도 동생은 정말 의연했고,

아이 둘을 남의 손에서 키우다시피 했으며, 그로 인해서 마음을 많이 다치기도 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2년 전에 공무원의 꽃이라는 사무관 시험에 남편이 먼저 합격을 했고, 

 이제 머지않은 장래에  교감선생님이 될 발판을 동생은 마련한 것이다.

다시금 동생에게 축하를 보내며,

부디 초심을 그대로 간직한 훌륭한 선생님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지금은 파주에 있는 고등학교 교감선생님으로 근무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