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에 처음 축조.
널리 알려지게 것은 조선시대 임진왜란(任辰倭亂)때 3대 대첩지였기 때문이다.
1845년 행주대첩비
권율 도원수 (1537~1599)동상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호는 만취당(晩翠堂)
군인, 백성, 승려, 부녀자 이분들의 피와 땀으로 오늘의 우리가 있으리니.
썰렁한 사진들.
행사가 다 끝나서 그럴까?
덕양정
한강과 인근지역의 풍경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정자.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347,670㎡이다. 정확한 축성연대와 목적은 알 수 없으며, 임진왜란 때 장군 권율(權慄)이 대첩을 이룬 싸움터이다.
1592년(선조 25) 7월 8일 이치(梨峙)에서 왜적을 격멸한 권율은, 12월 수원 독산성(禿山城)에서 다시 적을 물리친 뒤 서울 수복작전을 개시,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과 승장 처영(處英) 등 정병 2,300명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행주 덕양산(德陽山)에 진을 치고 서울 수복을 노렸다. 이때 왜군 총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의 부하 장성을 거느리고 3만여 병력으로 공격해왔다. 권율은 이들을 처절한 접전 끝에 크게 무찔렀다.
지금 산허리에 목책(木柵) 자리가 남아 있고, 삼국시대의 토기 조각이 출토되는 것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도 중요한 군사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1603년(선조 36)에 세운 행주대첩비와 1963년에 다시 세운 대첩비가 있으며, 1970년 권율의 사당인 충장사(忠莊祠)를 다시 짓고 정자와 문을 세웠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양 행주산성 [Haengjusanseong Fortress, Goyang, 高陽 幸州山城]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602년 행주대첩비
강아지를 데리고 밖에서 식사를 하려 했는데,
주인이 자꾸 들어 오란다.
오후 4시쯤 손님이 없는 시간이어서 그랬겠지?
고등어 조림과 갈치조림정식을 시켜는데,
개불과 회, 멍게등이 서비스로 나왔다.
가지수만 많았지. 정작 배를 채울 음식(?)은 아니었다.
미식가에게나 어울릴까? ^^*
고등어와 갈치조림이 한 접시에 나왔는데, 음식이 맛있었다.
딸 아이가 시킨 돌솥 영양밥.
맛으로는 먹어도 절대 양으로는 아니다.ㅎㅎ
나는 이 생선이 "메로"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참 촌스럽기도 하지.
마트에서 사다가 집에서 구워 먹어야 하겠다.
메로와 고추냉이는 찰떡궁합이다.
사실 강아지와 우리 시어머니께서는 바깥 구경을 잘 못하신다.
그저 둘이서 아침에 식구들이 출근하고 나면 저녁까지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신다.
등산, 수영, 베드민턴을 취미로 하셨고 여행도 정말 많이 다니셨는데
만사 귀찮아 하시는 것을 뵈니....이제 어머님도 늙으셨나 보다.
그래서 오늘의 자리를 만들었는데,
김밥 한 줄 사서 먹으면 돈이 훨씬 덜 들텐데...연신 말씀 하시면서도
잘 잡수셨다.^^*
남들은 해외로, 바닷가로, 계곡으로 피서를 떠났는데,
밥 한끼 같이 먹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해서....
오늘 도시엔 그저 우리만 남은 것 같다.
'**문화.예술** > 역사. 문화. 예술. 공연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영화박물관 / 서울 마포구 상암동 (0) | 2010.09.01 |
---|---|
Moon River (0) | 2010.08.05 |
I. O. U / Carry & Rom (0) | 2010.07.19 |
Nana Mouskouri (나무위키) (0) | 2010.07.16 |
옛사랑 / 이문세 (0) | 2010.06.30 |